트럼프 행정부의 신(新)통상 질서 - EU·일본과의 이면 합의 및 ‘한국 패싱’ 현황
1. 서론: 거래적 동맹 관계와 ‘한국 패싱’ 논란의 부상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통상 정책은 전통적인 동맹 관계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안보를 공유하는 동맹국을 경제적 이익을 다투는 경쟁자로 간주하며, 무역적자를 국가적 손실로 규정하는 제로섬(zero-sum) 게임의 관점이 그 핵심을 이룬다.1 이러한 기조 하에서 관세는 단순한 무역 조정 수단을 넘어, 동맹국으로부터 투자 유치, 시장 개방, 방위비 증액 등 광범위한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핵심적인 압박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3 이 과정에서 미국은 동맹국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대하기보다 각국의 경제 구조와 대미 의존도에 따라 차별적인 압박과 보상 체계를 적용하며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국 패싱(Korea Passing)’ 논란이 부상했다. 여기서 ’한국 패싱’은 단순히 협상 순서가 뒤로 밀리는 차원을 넘어, 경쟁 관계에 있는 유럽연합(EU)과 일본이 한국보다 유리한 조건의 합의를 먼저 타결함으로써 한국이 구조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고착되는 ‘역차별(reverse discrimination)’ 상황을 의미한다. 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동맹국들을 개별적으로 상대하여 각개격파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의도된 전략의 결과일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1 실제로 미국은 한국, 일본, EU와 각기 다른 시점에 상이한 방식으로 협상을 진행했다. 2018년 한국에는 철강 수출량을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쿼터제를 부과한 반면, 2025년 EU와 일본에는 관세를 기반으로 하되 거액의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거래를 제시했다. 이는 한국이 초기에 수용한 ’나쁜 선례(bad precedent)’가 이후 더 나은 조건의 협상에서 배제되는 구조적 문제로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본 보고서는 미-일, 미-EU 간 무역 합의의 공식 발표 내용과 그 이면에 숨겨진 실체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한국의 현 상황과 엄밀히 비교하여 ’한국 패싱’의 실체와 그 경제적 파급 효과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최종적으로는 이러한 신(新)통상 질서 속에서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전략적 제언을 도출하고자 한다.
2. 미-일 무역 합의의 다층적 분석: 발표와 이면의 진실
미-일 무역 합의는 트럼프 행정부의 거래적 동맹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백악관이 발표한 ’역사적 합의’의 이면에는 양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다층적 진실이 존재한다.
2.1 백악관 발표: ’역사적 합의’의 공식 내용
백악관은 미-일 무역 합의를 “미국-일본 무역 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반“이라고 평가하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5 합의의 공식적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관세 체계의 재편이다. 미국은 일본산 수입품 대부분에 대해 기존 관세에 추가 관세를 더해 최종 세율이 15%가 되도록 하는 ’기준 관세(baseline tariff)’를 적용하기로 했다.5 특히 일본 자동차 산업에 치명타가 될 수 있었던 자동차 및 부품 관세는 기존 2.5%에서 15%로 대폭 인상되었다.7 이는 당초 트럼프 행정부가 위협했던 25% 관세보다는 낮은 수준으로, 일본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피한 타협의 산물이었다.9
둘째, 일본의 대규모 반대급부 약속이다. 일본은 관세 인하의 대가로 미국에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8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농산물(쌀, 옥수수, 대두 등) 수입 확대, 미국산 보잉 항공기 100대 및 방산물자 추가 구매, 미국 자동차 안전기준을 그대로 인정하여 자국 시장의 비관세 장벽을 허무는 조치 등이 포함되었다.5
셋째, 5,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약속이다. 이는 합의의 핵심이자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부분이다. 일본은 미국 제조업 부흥과 반도체, 에너지, 조선 등 핵심 산업 재건을 위해 5,5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이 투자금의 운용은 미 상무장관이 위원장을 맡는 위원회에서 투자처를 선정하고, 발생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가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5
2.2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의 폭로: ’이면 합의’의 실체
백악관의 화려한 발표와 달리, 일본 내부에서는 합의의 실체에 대한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특히 협상을 주도했던 아카자와 류세이 경제재생상의 폭로는 ’이면 합의’의 존재를 강력하게 시사했다.
아카자와 장관은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5,500억 달러 투자 약속의 실체는 백악관의 발표와 다르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실제 현금 투자는 전체 금액의 1~2%에 불과한 약 55억에서 110억 달러 수준이며, 나머지는 법적 구속력이 약한 대출이나 대출 보증 형태라는 것이다.11 그는 더 나아가 “미국은 보증이나 대출에 관심조차 없다. 그냥 MOU 형식의 합의이며 지킬 필요도 없다“고 발언하며, 이 거액의 투자 약속이 사실상 강제성 없는 ’정치적 수사(political rhetoric)’에 가깝다는 점을 인정했다.11 닛케이 아시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해당 펀드가 투자에 실패해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미국은 전혀 책임지지 않으며, 일본수출입은행(JBIC) 등 일본의 국책 금융기관이 손실을 모두 처리하는 구조라고 보도했다.9
이러한 충격적인 폭로의 배경에는 일본 내 정치적 위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이 자국 내 홍보를 위해 합의 내용을 과장하여 발표하자, 일본 내에서는 ‘굴욕 외교’, ’국부 유출’이라는 엄청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자민당 총리 후보들조차 모를 정도로 극비리에 추진된 사안의 결과가 참담하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아카자와 장관이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 국내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실상을 공개한 것으로 분석된다.11
2.3 합의 이행 과정의 혼선과 불확실성
미-일 합의는 ’실질적 경제 교환’과 ’정치적 상징 교환’이 결합된 이중적 구조를 가진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내 지지층을 향해 ’역사상 최대 규모인 5,500억 달러 투자 유치’라는 거대한 상징적 성과를 얻었고, 일본은 최악의 관세 시나리오(25%)를 피하면서 실제 현금 지출은 최소화하는 실리를 챙겼다. 이처럼 양측의 정치적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 합의의 세부 사항은 명확하게 문서화되지 않았고 이는 이행 과정에서 혼선을 야기했다.
실제로 합의 발표 이후, 미국이 기존 관세에 15% 관세를 추가로 부과하는 ‘중복 부과(stacking)’ 실수를 범하자 일본이 즉각 항의했고, 미국은 이를 시인하며 소급 적용을 통한 환급을 약속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8 또한, 5,500억 달러 투자금의 운용 주체를 두고 미 상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완전한 재량권을 갖는다“고 주장한 반면, 아카자와 장관은 “미일 협의위원회를 통해 일본이 관여할 것“이라고 반박하며 양국 간의 이견을 노출했다.13 이는 합의의 법적 구속력이 약하고 양측의 해석이 다를 여지가 많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14 이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상에서 상대방의 정치적 체면을 세워주는 비(非)현금성, 비구속적 약속을 통해 실질적인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정무적 협상’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3. 미-EU 무역 합의의 구조와 전략적 함의
미-EU 무역 합의는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전략이 단순한 무역적자 해소를 넘어, 지정학적, 지경학적 목표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관세는 이 거대한 ’패키지 딜’을 성사시키기 위한 일종의 ‘입장료’ 역할을 했다.
3.1 ’거대 딜’의 탄생: 상호 관세 체계의 수용
미국과 EU는 “세계에서 가장 큰 두 경제권의 경제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조정하는” 역사적인 무역 합의를 타결했다.15 합의의 핵심은 EU가 자동차, 자동차 부품, 제약, 반도체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대미 수출품에 대해 15%의 기준 관세율을 수용하는 것이다.16 그 대가로 미국은 더 높은 추가 관세 부과 위협을 철회하고, EU는 미국산 공산품에 대한 모든 관세를 철폐하기로 약속했다.15
이는 표면적으로는 상호적 합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명백한 비대칭적 구조를 가진다. 미국은 EU산 제품에 15% 관세를 부과하여 매년 수백억 달러의 안정적인 관세 수입을 확보하게 된 반면, EU는 미국 제품에 대한 관세를 없애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15 이는 EU가 ’전면적인 무역 전쟁’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해 상당한 경제적 양보를 감수한 결과로 평가된다. EU 무역 담당 집행위원 역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딜“이었다고 평가하며 협상의 어려움을 시인했다.16
3.2 EU의 대규모 반대급부: 에너지 구매와 대미 투자
EU는 관세 수용 외에도 미국에 막대한 규모의 반대급부를 약속했다.
첫째, 천문학적인 규모의 에너지 구매 약속이다. EU는 2028년까지 7,5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액화천연가스(LNG), 석유 등)를 구매하기로 했다.15 이는 단순한 무역 균형 맞추기를 넘어선다. 이 약속은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유럽의 의존도를 결정적으로 낮추고 그 자리를 미국이 차지하려는 명백한 지정학적 목표를 담고 있다. 즉, 미국은 무역 협상을 통해 자국의 ’에너지 패권’을 강화하고, 동시에 러시아를 유럽 에너지 시장에서 배제하는 다목적 전략을 성공시킨 것이다.
둘째, 대규모 투자 약속이다. EU는 트럼프 대통령 임기 동안 6,000억 달러를 미국에 신규 투자하기로 합의했다.15 이는 일본의 투자 약속과 마찬가지로 미국 내 제조업 부활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국정 과제를 지원하는 성격을 가진다.
3.3 전략적 함의: 선례 확립과 동맹 압박
미-EU 합의는 일본에 이어 세계 최대 경제 블록마저 트럼프식 ‘관세-투자/구매 교환’ 모델을 수용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다른 동맹국, 특히 한국과의 향후 협상에서 미국이 활용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선례(precedent)를 확립한 것이다. 미국은 “EU도 수용한 조건“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한국을 압박할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을 확보했다.7
이 합의는 단순한 무역 협정을 넘어, 미국의 더 큰 지정학적 경쟁 구도에 동맹국을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합의문에는 공급망 재편, 투자 안보 협력, 제3국(사실상 중국)의 비시장적 관행에 대한 공동 대응 등 안보와 경제가 결합된 조항들이 다수 포함되었다.19 이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상이 더 이상 관세율이나 수출 물량 같은 개별 통상 항목에 국한될 수 없음을 의미하며, 외교·안보적 사안까지 연계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EU 내부에서는 이 합의가 유럽 기업들의 경쟁력을 심각하게 훼손할 것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독일의 메르츠 총리는 “미국과 EU 모두에게 상당한 피해를 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관세 비용이 미국 소비자에게 전가되어 수요를 위축시킬지, 아니면 유럽 기업들이 손실을 감수하고 흡수할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유럽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16
4. 비교 분석: EU·일본 모델 대(對) 한국의 현실
EU와 일본이 미국과 새로운 통상 합의를 타결하면서, 과거의 틀에 묶여 있는 한국의 불리한 입장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철강과 자동차 등 주력 산업에서 ’역차별’이 고착화되고 있으며, 이는 한국 경제에 심각한 위협 요인으로 작용한다.
4.1 철강 산업: ’쿼터제’의 족쇄와 ’역차별’의 고착화
철강 산업은 한국이 겪는 역차별의 상징적인 사례다. 2018년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한국은 25%의 고율 관세를 피하는 대가로 2015년부터 2017년까지의 평균 수출량의 70% 수준(연간 약 268만 톤)으로 수출 물량을 제한하는 쿼터제(Quota)를 수용했다.20 이는 수출할 수 있는 총량에 ’절대적 상한선’이 설정된 매우 경직적인 방식이다.
반면, EU와 일본은 최근 협상을 통해 훨씬 유연한 저율할당관세(TRQ, Tariff-Rate Quota) 방식을 확보했다. EU는 연간 330만 톤, 일본은 125만 톤까지 무관세로 수출하고, 그 물량을 초과하는 경우에만 25%의 관세를 적용받는다.22 특히 일본에 할당된 125만 톤은 고율 관세 부과로 인해 이미 대미 수출이 줄어든 시점을 기준으로 산정된 것이어서, 사실상 거의 모든 수출 물량이 무관세 혜택을 받는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린다.22
이러한 구조적 차이는 명백한 역차별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미국 내 인프라 투자 확대로 철강 수요가 급증하더라도 한국은 쿼터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에 묶여 추가 수출 기회를 잡을 수 없다. 하지만 EU와 일본은 25%의 관세를 감수하고서라도 수출을 늘릴 수 있는 선택지를 가진다.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 정부는 “한국은 관세를 내지 않는 쿼터제를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관세를 무는 EU, 일본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논리로 재협상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24 이는 한국이 초기에 내린 전략적 선택이 오히려 장기적인 족쇄가 되어버린 상황을 보여준다.
4.2 자동차 산업: ‘15% 관세’ 선례의 직접적 위협
자동차 산업 역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EU와 일본이 모두 자동차 및 부품에 대해 15% 관세를 수용함에 따라, 이 세율은 사실상 향후 한국과의 협상에서 적용될 ’사실상의 표준(de facto standard)’으로 굳어졌다.7
이는 한국에 특히 치명적이다. 일본은 기존에 2.5%의 관세를 내고 있었으므로 12.5%p의 추가 부담이 발생하지만, 한미 FTA에 따라 무관세를 적용받던 한국은 15%p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어 상대적으로 더 큰 타격을 입게 된다.25 현대차그룹의 미국 매출 비중이 약 25~30%에 달하는 상황에서 15%의 관세는 연간 이익을 절반 가까이 감소시킬 수 있는 재앙적인 수준이다.26 이는 곧바로 국내 자동차 생산량 감소(-4.2%)와 전반적인 산업 생산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수많은 부품 협력업체의 연쇄 도산 위기로 번질 수 있다.27
4.3 핵심 비교 분석표
EU, 일본, 한국이 미국과의 통상 협상에서 얻어낸 결과의 차이는 아래 표를 통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표는 복잡한 3자간 협상 결과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도록 시각화하여 ’한국 패싱’과 ’역차별’의 실체를 직관적으로 증명한다. 각 항목별로 한국이 처한 불리한 위치를 명확히 드러냄으로써, 정책 결정자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즉각적으로 전달하는 핵심 분석 도구로 기능한다.
Table 1: 미국의 주요 동맹국(EU, 일본, 한국) 대상 통상 합의 결과 비교
| 구분 항목 | 미국-EU 합의 | 미국-일본 합의 | 한국의 현재 상황 |
|---|---|---|---|
| 핵심 합의 구조 | 상호 관세 체계 + 대규모 구매/투자 패키지 딜 | 기준 관세 설정 + 대규모 투자 약속 | 구(舊)모델: 관세 면제 대가로 수출 물량 제한 (쿼터제) |
| 자동차 관세 | 15% 관세 수용 (미국의 추가 관세 위협 철회) | 15% 관세 수용 (기존 2.5% → 15%) | 15% 관세 부과 유력 (기존 0% → 15%, 가장 큰 피해 예상) |
| 철강 관세 | 저율할당관세(TRQ): 연 330만 톤까지 무관세, 초과분 25% | 저율할당관세(TRQ): 연 125만 톤까지 무관세, 초과분 25% | 절대량 쿼터: 연 약 268만 톤 상한, 추가 수출 원천 불가 |
| 주요 반대급부 | 6,000억 달러 투자 + 7,500억 달러 에너지 구매 + 미국산 공산품 관세 철폐 | 5,500억 달러 투자 약속 + 농산물/항공기 구매 | 방위비 분담금 증액, 기존 대미 투자 등 |
| 이면의 진실/특징 | 비대칭적 합의: EU는 시장을 열고 미국은 관세를 걷음. 지정학적 목표(탈러시아) 연계. | 상징적 합의: 5,500억 달러 투자의 실체는 1~2% 현금. 정치적 수사와 실리의 교환. | 경직적 구조: 시장 상황 변화에 대응 불가. 역차별 고착화. 재협상 난항. |
5. 한국 산업에 미치는 파급 효과 및 리스크 평가
트럼프 행정부의 차별적 통상 정책은 한국의 주력 산업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국가 경제 전반의 불확실성을 증대시키는 구조적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대미 수출은 직접적인 규제로 막히고, 미국으로의 투자는 강요받는 ’이중의 덫(a double bind)’에 빠질 위험이 크다.
5.1 주력 산업의 직접적 타격
철강 산업은 이미 쿼터제의 피해를 체감하고 있다. 대미 수출량이 2015~2017년 연평균 383만 톤에서 쿼터 시행 이후 268만 톤 수준으로 대폭 축소된 상태다.20 이런 상황에서 EU와 일본산 철강이 무관세 또는 낮은 관세로 미국 시장에 유입되면, 한국산 철강의 가격 경쟁력은 더욱 하락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고부가가치 제품인 유정용 강관 등 핵심 수출 품목의 시장 점유율을 경쟁국에 내주는 결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24
자동차 산업이 직면한 리스크는 더욱 심각하다. 15% 관세가 현실화될 경우, 대미 자동차 수출은 급감하고 국내 생산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27 이는 현대차, 기아 등 완성차 업체뿐만 아니라 수많은 1, 2차 부품 협력업체의 연쇄적인 경영난으로 이어질 것이다. 관세 부담을 회피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은 미국 현지 생산을 확대하는 것인데, 이는 국내 산업 공동화와 양질의 일자리 감소를 가속화하는 요인이 된다.29 결국 수출 감소와 자본 유출이라는 두 가지 부정적 효과가 동시에 발생하며, 한국의 부(富)와 산업 기반이 미국으로 이전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는 미국의 제조업 부활이라는 목표가 동맹국의 희생을 통해 달성되는 구조임을 보여준다.
5.2 공급망 및 투자 불확실성 증대
불리하고 차별적인 통상 조건은 한국을 글로벌 투자처로서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글로벌 기업들은 공급망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통상 리스크가 큰 한국을 배제하거나 비중을 축소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한국이 글로벌 가치 사슬(GVC)에서 소외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미국의 통상 정책은 한국 기업들의 장기 투자 계획 수립을 극도로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기업들의 설비투자를 위축시키고 신규 고용을 꺼리게 만들어, 국가 경제의 성장 잠재력 자체를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진다.27 기업들은 수출과 현지 투자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어려운 전략적 과제에 직면하게 되며, 이는 장기적으로 한국의 산업 경쟁력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위협이다.
6. 미국의 전략적 의도: 단순 통상 압박을 넘어선 ‘경제적 정복’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정책을 단순한 무역적자 해소 시도로만 해석하는 것은 그 본질을 간과할 수 있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를 동맹국들을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는 더 큰 ’그랜드 플랜’의 일환으로 평가한다.2 이 관점에 따르면, 미국의 목표는 유럽, 일본, 한국과 같은 동맹국들을 산업 경쟁자에서 탈락시키고, 이들의 핵심 산업을 미국으로 이전시켜 ’신식민지적 종속 관계(neo-colonial dependencies)’로 재편하는 것이다.2
이러한 ‘경제적 정복(economic conquest)’ 전략의 핵심 도구는 바로 관세 위협을 통한 ’금융적 갈취(financial shakedown policy)’이다.1 예를 들어, 한국이 자동차 관세 폭탄을 피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단행해야 했던 것이나, 일본이 5,5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보호비(protection money)’를 약속해야 했던 사례는 이 전략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1 즉, 군사적 충돌 없이도 무역이라는 무기를 통해 동맹국의 수출 기반과 고용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위협을 가함으로써,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2
따라서 ’EU, 일본, 미국이 공모하여 한국을 의도적으로 부도내려 했다’는 가설은 현재까지의 분석으로는 명확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미국이 EU와 일본을 포함한 모든 동맹국을 잠재적 경제 경쟁자로 간주하고, 각국의 약점을 파고들어 개별적으로 굴복시키는 ‘경제적 정복’ 전략을 구사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1 이 과정에서 EU와 일본은 한국보다 나은 조건의 협상을 이끌어냈지만, 그들 역시 미국의 거대한 전략 아래에서 상당한 대가를 치른 행위자이지, 한국을 공격하기 위한 공모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7. 결론 및 전략적 제언
7.1 결론: ’한국 패싱’의 실체 확인
본 보고서의 심층 분석 결과, ’트럼프 행정부가 EU와 일본에 유리한 이면 계약을 맺고 한국을 속이고 있다’는 문제 제기는 상당 부분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이면 계약’은 일본의 5,500억 달러 투자 약속 사례에서 보듯, 공식 발표와 실제 내용 간에 큰 괴리가 존재하는 ’상징적 합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협상이 실질적 경제 이익뿐만 아니라 정치적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한국 패싱’은 철강 분야에서 나타나는 명백한 ’역차별’과 자동차 분야에서 형성된 불리한 ’관세 선례’로 구체화되었다. 이는 한국이 과거에 수용한 경직적인 쿼터제에 발목이 잡힌 채, 경쟁국들이 더 유연하고 유리한 조건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로 귀결되었다.
셋째, 이러한 현상은 트럼프 행정부의 의도된 ‘동맹 차별화’ 및 ‘각개격파(divide and conquer)’ 전략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동맹국의 산업 기반을 약화시켜 미국으로 이전시키려는 ’경제적 정복’의 일환으로 분석된다.1 미국은 동맹국들을 개별적으로 상대하며 각국의 약점을 파고들어 자국 이익을 극대화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7.2 전략적 제언
이러한 엄중한 현실 인식하에, 한국은 다음과 같은 다각적인 대응 전략을 시급히 수립하고 이행해야 한다.
(1) 거래적 협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전통적인 동맹 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냉철하고 실용적인 ‘거래적 협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미국의 정치적 요구(상징적 성과)와 한국의 경제적 실리(실질적 피해 최소화)를 맞바꾸는 유연한 협상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사례처럼,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면서도 우리의 실질적 부담은 최소화하는 ’정무적 해법’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2) ‘패키지 딜’ 대응 역량 강화: 미국이 무역, 안보, 기술, 투자를 연계하는 ’패키지 딜’을 시도할 것에 대비하여, 산업통상자원부, 외교부, 국방부, 기획재정부 등을 아우르는 범정부 차원의 통합 협상팀을 구성해야 한다. 통상 문제에만 매몰되지 않고, 우리가 미국에 제공할 수 있는 안보, 첨단기술, 공급망 협력 등 비(非)통상 분야의 레버리지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이를 협상 카드로 활용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3) 다자 협력 및 연대 모색: 미국의 강력한 양자 압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유사한 입장에 처한 다른 동맹국들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EU, 일본 등과 비공식적으로라도 미국의 협상 전략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공동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채널을 활성화해야 한다.30 이는 미국의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무력화하고, 개별 국가가 감당해야 할 압박의 강도를 분산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4) 시장 다변화 및 산업구조 고도화 가속: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무역 의존도가 초래하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재확인한 만큼, 수출 시장 다변화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 특히 자동차 산업의 경우, 대미 수출 감소에도 불구하고 유럽 등 대체 시장에서 활로를 개척한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신흥 시장 공략을 가속화해야 한다.32 동시에, 보호무역주의의 높은 파고를 넘기 위해 압도적인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초격차 산업을 육성하고, 핵심 소재·부품·장비의 공급망 내재화를 통해 외부 충격에 흔들리지 않는 산업 생태계의 복원력을 강화하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
8. 참고 자료
- Michael Hudson - Trump’s Tariff Wars Hit Europe, Korea, and Japan, https://braveneweurope.com/michael-hudson-trumps-tariff-wars-hit-europe-korea-and-japan
- Michael Hudson: Trump attacks Europe, Korea, Japan, forcing them to subsidize & move industry to US - Geopolitical Economy Report, https://geopoliticaleconomy.com/2025/09/12/michael-hudson-trump-economic-war-europe-korea-japan/
- ‘日방위비 2배 증액’ 얻어낸 美트럼프, 다음은 한국?…‘동맹 청구서’ 온다 - 뉴스1, https://www.news1.kr/diplomacy/defense-diplomacy/5683580
- Globalisation isn’t dying, it’s changing amid Trump tariffs: American economist John Phillip Lipsky, https://m.economictimes.com/news/international/business/globalisation-isnt-dying-its-changing-amid-trump-tariffs-american-economist-john-phillip-lipsky/articleshow/124278055.cms
- Implementing The United States–Japan Agreement - The White House, https://www.whitehouse.gov/presidential-actions/2025/09/implementing-the-united-states-japan-agreement/
- Fact Sheet: President Donald J. Trump Implements A Historic U.S.-Japan Framework Agreement - The White House, https://www.whitehouse.gov/fact-sheets/2025/09/fact-sheet-president-donald-j-trump-implements-a-historic-u-s-japan-framework-agreement/
- Japan’s lead trade negotiator defends tariffs deal with the US, https://apnews.com/article/japan-us-tariffs-trump-akazawa-34819669ed48ad75ab480fcb3b9adce8
- New Documents Reveal Next Steps for U.S.-Japan Trade Deal - CSIS, https://www.csis.org/analysis/new-documents-reveal-next-steps-us-japan-trade-deal
- “The Largest Trade Deal in History”: Implications of the US-Japan Trade Deal, https://www.hudson.org/trade/largest-trade-deal-history-implications-us-japan-trade-deal-william-chou
- Fact Sheet: President Donald J. Trump Secures Unprecedented U.S.–Japan Strategic Trade and Investment Agreement - The White House, https://www.whitehouse.gov/fact-sheets/2025/07/fact-sheet-president-donald-j-trump-secures-unprecedented-u-s-japan-strategic-trade-and-investment-agreement/
- “일본 이면합의 폭로”… 제2의 IMF로 한국 희생양 삼으려 했나? | 밀리 …, https://v.daum.net/v/pUIFS3g26s
- US admits ‘mistake’ in implementation of trade deal with Japan, pledges to fix it: Tokyo, https://www.aa.com.tr/en/asia-pacific/us-admits-mistake-in-implementation-of-trade-deal-with-japan-pledges-to-fix-it-tokyo/3653543
- Akazawa says U.S. trade deal not settled as Japan awaits pharma and chip orders, https://www.japantimes.co.jp/business/2025/09/07/us-japan-deal-not-sett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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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ct Sheet: The United States and European Union Reach Massive Trade Deal, https://www.whitehouse.gov/fact-sheets/2025/07/fact-sheet-the-united-states-and-european-union-reach-massive-trade-d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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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US trade deal explained - European Commission, https://ec.europa.eu/commission/presscorner/api/files/document/print/en/qanda_25_1930/QANDA_25_1930_E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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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EU 이어 日과 철강관세 타결…한국기업 직격탄 우려,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2020893571
- 韓, 대미 ‘철강 쿼터’ 사수 급선무…물량 지켜도 수익성 하락 불보듯 - 서울경제, https://www.sedaily.com/NewsView/2GOX0C89VT
- 美, EU 이어 日과 철강 관세 합의… 韓 역차별 우려 - 머니S, https://www.moneys.co.kr/article/2022020908248064251
- 美, EU 이어 日과 철강분쟁 타결…한국과는 협상 시작도 안돼(종합2보) -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220208001852071
- 미국, EU 일본과는 철강 관세분쟁 타결…. 한국에는 역차별? - 서울신문, https://www1.seoul.co.kr/news/economy/industry/2022/02/08/20220208500055
- [동앵과 뉴스터디]트럼프에 큰돈 주고 관세 낮춘 한국-일본, 누가 덜 뺏겼나? - 채널A, https://ichannela.com/news/detail/000000485513.do
- 현실이 된 트럼프의 ‘25%’ 관세폭탄…현대차 시작으로 배터리·반도체 줄타격 우려, https://www.investchosun.com/site/data/html_dir/2025/04/03/2025040380107.html
- 트럼프 자동차 관세 충격에 국내 산업 전체가 휘청,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81
- (이슈) 강관업계, ’美 철강 쿼터 폐지’에 무분별한 수출 확대 신중해야, http://www.snm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50371
- 미국 신정부의 관세정책이 한국 자동차산업에 미치는 영향과 시사점 - KDI 경제교육, https://eiec.kdi.re.kr/policy/domesticView.do?ac=0000196028
- Japan’s ‘Plan A+’ Strategy in the Trump Era: Toward More Cooperation with Europe | Ideas and Analyses | 日米関係インサイト, https://www.spf.org/jpus-insights/ideas-and-analyses-en/20250730.html
- When East meets West meets Trump’s America: European diplomacy in the Indo-Pacific, https://ecfr.eu/article/when-east-meets-west-meets-trumps-america-european-diplomacy-in-the-indo-pacific/
- 트럼프 관세에도 9월 역대최대 수출…반도체·자동차 ‘쌍끌이’(종합), https://www.yna.co.kr/view/AKR20251001034352003